낮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틈이 없다. 병원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야 하고, 집에 오면 아이의 저녁과 씻는 시간, 내일 준비물 같은 일들이 또 이어진다. 그런데 집안이 모두 조용해진 뒤에는 미뤄 두었던 마음이 천천히 의자 옆으로 다가온다. 오늘이 꼭 그런 밤이었다. 특별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, 이상하게 하루의 무게가 늦게 느껴졌다.
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머그컵을 꺼냈다. 늘 마시던 차였는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따뜻했다. 엄마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자동으로 쓰이는 말이다. 챙기고, 기억하고, 먼저 눈치채고, 작은 틈을 메우는 일들. 의사라는 역할도 결국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. 둘 다 누군가를 먼저 살피는 일이라서 가끔은 내 감정이 가장 뒤로 밀리곤 한다.
그래도 이렇게 몇 분이라도 멈춰 앉아 있으면 마음이 조금 제자리로 돌아온다. 오늘 잘한 것보다 놓친 것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이 있지만, 그 습관이 늘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. 완벽하지 않아도 하루를 끝까지 건넜고, 다시 내일을 준비할 힘이 남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다. 오늘의 차 한 잔은 그런 마음으로 마신 것이었다.